power classic_ 내가 바꾼 삶

  • 사진_정여울, 글_어수웅
    나폴리 오페라 극장 5층에서 예브게니 오네긴 상연을 기다리며

    입력 : 2015.08.28 15:34

     

    느리게 이끌려가는 일

     
    “TV 시청이나 인터넷 검색으로는 인생을 배우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요. 남의 인생을 엿보기만 할 뿐, 내 인생을 살아가는 시간이 아닌 거죠. 그에 비해 책을 읽는 일은 내 인생을 살면서 남의 인생을 엿보는 두 가지 일을 동시에 하는 거예요. 관음증적인 쾌락을 넘어서 말이에요. 책을 읽는 시간 동안 내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고, 왜 이해가 안 되는지 고뇌하고, 왜 이해는 되면서 나는 그렇게 책 속의 주인공처럼 용감하게 살아갈 수 없는지 고민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자신도 모르게 한 뼘 성장하게 되지요. 그래서 저는 책을 굉장히 느리게 읽어요.”

     
    이 대목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독서에 무심한 것으로 보이는 요즘 젊은이들의 세태. 독서의 가치를 뭐라고 요약하겠냐고 물었을 때, 문학평론가 정여울의 대답이었다.

     
    사실 책 읽기와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문학평론가에게 ‘내 인생의 책’을 묻는 것은 폭력적이다. 단 한 권의 책을 선택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테니까. 정여울 역시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가 울 것 같아요.”라고 위트 있게 대꾸했다.

     
    100년 내에 사멸할 것 같은 직업이 있다면 신문 기자와 함께 열손가락 안에 꼽힐 것 같은 직업, 문학평론가. 그는 이 우울한 예측을 보기 좋게 뒤엎고 올해 상반기 베스트셀러 1위의 작가가 되는 ‘쾌거’를 이뤘다. 인문향 나는 여행서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이 그 책이다. 문향 물씬 풍기는 이 풍요로운 여행서를 쓰면서 대중의 사랑까지 얻게 된 이 작가의 내면과, 그를 이 자리로 이끈 책들이 궁금했다. 정여울을 문학으로 이끈 책, 그리고 정여울을 여행으로 이끈 책.

     

     

    로마의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핀초 언덕에서 사진을 찍는 연인들

    벚꽃 피는 봄날 포로 로마노 바깥에서 바라본 포로 로마노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에서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유물을 관람하는 소년

     

    돌아온 탕아처럼 선택한 문학

     
    우선 문학부터. “중학교 시절부터 기말고사가 끝나면 서점으로 달려가 소설책을 잔뜩 사보는 버릇이 있었어요. 대학생 때는 그 버릇을 확장시켰죠. 다음 날이 시험인데도 학교 앞 사회과학 서점에서 선 채로 소설 한 권을 다 읽기도 했어요. 그리고는 일기를 쓰듯 그 감동을 충동적으로 적어 내려갈 때가 많았죠.” 그는 한 권의 책이 자신의 생각을 바꾼 게 아니라,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아가지 않으면 내가 아닌 완전히 딴 사람이 될 것만 같은 공포 때문에 이 길을 택한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서울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국문과에서 석박사 과정을 밟았다. 처음에는 문학을 직업으로 선택할 생각은 없었다고 했다. 물론 독문과라는 선택 역시 ‘문학’이었지만, 좋아하는 취미 정도로만 삼으려 했다는 고백이다. “정말로 좋아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으면 숨을 곳, 쉴 곳, 도망칠 곳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대학원 진학을 앞둔 순간, 다른 선택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회학과, 국사학과, 인류학과, 서양사학과 등 다양한 수업을 다 들어봐도 자신의 글쓰기 욕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학과는 없었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길로부터 한사코 도망치고 싶은 반항심이 마침내 잦아들고 돌아온 탕아처럼 문학을 선택한 것 같아요.”

     
    다른 학과, 다른 전공과목의 수많은 리포트를 쓰다가 결국 ‘포기’하고, 문학으로 돌아왔다. 대학원 국문과 진학. 그때 마음에 가장 큰 영감을 주었던 책은 문학평론가 김현의 『전체에 대한 통찰』과 김윤식의 『한국 근대문예비평사 연구』였다.

     

     

    비엔나에 있는 프로이트 박물관 내부

    카프카 생가 앞 카프카 얼굴의 부조

    동네 까페에서 책을 읽다가(저자)

     

    곁에 두고 오래 바라보는 친구

     
    역설적으로 그를 여행으로 이끈 계기 역시 문학이다. “책만 읽는 내 삶이 너무도 나약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어요. 박사과정이 끝날 무렵. 공부는 좋았지만 ‘평생 공부하는 나’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와르르 무너지는 순간이었죠. ‘여행의 역사’에 대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한 적이 있었는데, 자괴감이 밀려 들었어요. 배낭여행 한 번 제대로 못한 내가, ‘여행의 역사’를 강의하다니. 그때 처음으로 글로만 읽는 여행을 넘어, 몸으로 떠나는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 카사노바의 여행기, 『이븐바투타 여행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등이 그에게 여행의 꿈을 꾸게 했던 책들이다. 집과 학교밖에 모르던 샌님같은 정여울에게 마침내 머나먼 여행을 꿈꾸게 한 것도 결국 책읽기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미 고백했듯, ‘내 인생을 바꾼 책’이라는 표현은, 특히 단 한 권만 고르라는 것은 “터무니 없이 과한 표현”이라며 웃었다.

     
    “제게 그런 질문을 하시는 분들의 눈빛은 좀 무서워요.(웃음) 한 번에 한 인간의 모든 체험의 엑기스를 빼먹어버리겠다는 과한 욕심이 느껴질 때도 있거든요. 아무리 대단한 걸작 한 편을 읽는 것도, 항상 책을 끼고 살며 ‘책 자체’보다 ‘책을 읽는 습관’을 사랑하는 사람의 오랜 체험을 따라갈 수는 없어요. 항상 부적처럼 책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들은 ‘나쁜 책’에서조차 감동을 받고, 배울 것을 찾고, 마침내 마음 속에 더 나은 책 한 권을 만듭니다.” 그는 책이 엄청난 비밀을 숨긴 무덤 속의 보물창고가 아니라고 했다. 그 대신 늘 곁에 두면서도 그 존재의 빛을 깨닫지 못하는 아주 오래된 친구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한 권 한 권의 책은 저마다의 인격과 성깔을 지니고 있는 존재. 이해하기 어려운 책들은 정말 사귀고 싶지만 다가가기 어려운 친구고, 항상 곁에 두고 힘들 때마다 꺼내보는 책은 늘 그립지만 연락이 닿지 않은 친구. 잃어버린 친구가 그리울 때마다, 친구에게 상처받을 때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친구를 사귀고 싶을 때마다, 책을 사러 서점에 다녔다고 했다.

     
    “위대한 책 한 권보다 우리를 바꾸는 것은, 항상 책과 대화할 줄 아는 심성이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정여울은 책을 느리게 읽는다고 했다. 외부의 원고 청탁이 있을 때면 어쩔 수 없이 빨리 읽어야 할 경우도 있지만, 그런 책도 나중에 ‘내 영혼과 만나는 시간’에는 천천히, 믿을 수 없이 느려터진 속도로 읽는다는 것. 그 시간이 진짜 내 영원한 친구이자 스승인, 책과 만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문약(文弱)은 역설적으로 축복의 일종입니다. 대중문화는 손쉽고 달콤한 쾌락이지만, 어떤 지식과 예술의 향기로부터도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집단적 마취 상태를 양산하는 것이죠. 책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흡수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영혼과 만나는 것, 인류의 지나간 발자취를 내 손으로 더듬는 적극적인 몸짓이 되어야 한다고, 저는 아직도 촌스럽게, 그러나 굳게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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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VON 2014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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